살사 (음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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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살사(Salsa)는 스페인어로 소스를 의미하며, 1930년대 쿠바 음악에서 기원하여 재즈, 소울, 록 등의 요소를 융합하여 1970년대 뉴욕에서 발전한 라틴 음악 스타일이다. 살사 음악은 일반적으로 분당 160~220 비트(bpm)의 빠른 템포로, 클라베 리듬을 기반으로 하며 콩가, 봉고, 팀발레스 등의 타악기와 트럼펫, 트롬본 등의 관악기를 사용한다. 살사 음악은 쿠바의 손 몬투노에서 영향을 받았으며, 맘보, 차차차 등과 함께 라틴 음악의 주요 장르로 자리 잡았다. 1980년대 이후 콜롬비아, 베네수엘라 등 라틴 아메리카 각국에서 자체적인 살사 음악이 제작되었으며, 1990년대에는 팝 살사와 팀바가 인기를 얻으며 세계적으로 확산되었다. 살사 가사는 댄스, 로맨스, 사회 비판 등 다양한 주제를 다루며, 춤과 함께 발전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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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사 (음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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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르 정보 | |
다른 이름 | 살사 |
스타일적 기원 | 손 쿠바노 손 몬투노 차차차 볼레로 룸바 맘보 재즈 R&B 록 플레나 봄바 |
문화적 기원 | 푸에르토리코 및 쿠바 공동체 (미국, 특히 뉴욕 시) |
악기 | 색소폰 트롬본 트럼펫 콩가 팀발레스 베이스 드럼 봉고 |
하위 장르 | 살사 로맨티카 살사 두라 |
파생 장르 | 팀바 |
지역적 장면 | 콜롬비아 코스타리카 쿠바 도미니카 공화국 엘살바도르 온두라스 멕시코 니카라과 파나마 푸에르토리코 미국 베네수엘라 |
관련 주제 | 송고 음악 창구이 모잠비크 |
기원 | |
기원 | 1960년대 뉴욕 |
2. 용어의 기원
'살사'라는 용어가 어떻게 음악 장르를 지칭하게 되었는지는 여러 음악가와 역사학자들 사이에서 논쟁의 대상이 되어왔다. 그 기원은 1930년대 이그나시오 피녜이로의 곡 "Échale salsita"에서 찾기도 하고, 체오 마르케티, 베니 모레와 같은 음악가들이 공연 중 "살사"를 외치며 음악의 열기를 표현한 것에서 유래했다고 보기도 한다.
하지만, 푸에르토리코 출신 음악 프로모터 이지 사나브리아는 자신이 1973년 텔레비전 쇼 ''살사''를 통해 이 용어를 처음 사용했다고 주장하며, 이 용어가 음악가들이 아닌 자신에 의해 홍보되었다고 밝혔다.
이러한 배경 때문에 '살사'라는 용어 사용은 음악가들 사이에서도 논란이 되었다. 셀리아 크루즈나 윌리 콜론처럼 이 용어가 다양한 쿠바 리듬을 통합하는 긍정적인 의미를 지닌다고 칭찬하는 이들도 있었지만, 마치토나 티토 푸엔테와 같이 이 용어가 상업적인 목적을 위해 사용되는 것에 반대하는 이들도 있었다.
결국, '살사'라는 용어는 마케팅 잠재력 때문에 마치토, 푸엔테를 포함한 쿠바 음악가들조차 재정적인 이유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2. 1. 어원 논쟁
'살사'는 스페인어로 소스를 의미한다. 이 단어가 음악 스타일과 연결된 기원은 여러 음악 작가와 역사학자들 사이에서 논쟁의 대상이 되고 있다.음악학자 맥스 살라자르는 이 연결의 기원을 1930년 이그나시오 피녜이로가 "Échale salsita"(양념을 좀 쳐봐)라는 곡을 작곡했을 때로 추적했다.[19] 이 문구는 피녜이로가 밴드에게 템포를 높여 "춤추는 사람들을 흥분시키라"고 외치는 외침으로 여겨진다.[20] 1940년대 중반, 쿠바 출신 체오 마르케티는 멕시코로 이민했다. 그는 자신의 그룹 이름을 Conjunto Los Salseros라고 지었고, 그들과 함께 Panart와 Egrem 레이블에서 앨범 두 장을 녹음했다. 이후 멕시코 시티에 거주하면서 음악가 베니 모레는 공연 중에 "살사"라고 외치며 음악의 열기를 인정했고, 이는 멕시코에서 만들어진 매운 살사 (소스)와 연결되었다.[20][21]
푸에르토리코 출신 음악 프로모터 이지 사나브리아는 살사라는 단어를 음악 장르를 지칭하는 데 처음 사용했다고 주장한다.
1973년, 저는 텔레비전 쇼 ''살사''를 진행했는데, 이것이 이 특정 음악을 ''살사''라고 지칭한 최초의 사례였습니다. 저는 [그 용어] ''살사''를 사용했지만, 음악은 그것으로 정의되지 않았습니다. 음악은 여전히 라틴 음악으로 정의되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매우, 매우 광범위한 범주였는데, 마리아치 음악까지 포함되었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을 포함합니다. 그래서 살사는 이 특정 유형의 음악을 정의했습니다... 누구나 발음할 수 있는 이름입니다.[22]
사나브리아의 잡지 ''Latin New York''은 영어로 발행되었다. 결과적으로, 그가 주최한 행사들은 ''뉴욕 타임스'' 뿐만 아니라 ''타임'' 및 ''뉴스위크'' 잡지에서도 다루어졌다.[23] 사나브리아는 살사라는 용어가 음악가들에 의해 개발된 것이 아니라고 고백했다. "음악가들은 음악을 만드는 데 바빴지만 살사라는 이름을 홍보하는 데는 아무런 역할도 하지 않았다."[24] 이러한 이유로 살사라는 용어의 사용은 음악가들 사이에서 논란이 되어 왔다. 어떤 사람들은 그것의 통합적인 요소를 칭찬했다. 셀리아 크루즈는 "살사는 다른 이름의 쿠바 음악입니다. 그것은 맘보, 차차차, 룸바, 손... 모든 쿠바 리듬을 하나의 이름으로 묶은 것입니다."[25] 윌리 콜론은 살사를 정확한 음악 스타일이라기보다는 광범위한 의미에서 통합하는 힘으로 묘사했다. "살사는 다양한 라틴계 및 비라틴계 인종 및 민족 집단을 통합하는 힘이었습니다... 살사는 모든 라틴 문화의 조화로운 총합입니다."[26]
반면에, 일부 뉴욕 기반 예술가들조차 처음에는 그 이름으로 음악을 상업화하는 것에 반대했다. 마치토는 "살사에는 새로운 것이 없습니다. 그것은 50년 이상 쿠바에서 연주된 것과 똑같은 옛 음악일 뿐입니다."라고 말했다. 마찬가지로, 티토 푸엔테는 "제가 아는 유일한 살사는 케첩이라는 병에 담겨 판매됩니다. 저는 쿠바 음악을 연주합니다."[27]라고 말했다. 쿠바 음악학자 마이라 마르티네스는 "살사라는 용어는 쿠바의 기반, 음악의 역사 또는 쿠바 내 역사의 일부를 모호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살사는 제리 마수치, 파니아, 그리고 CBS와 같은 다른 음반 회사들이 음악에 대한 헤게모니를 갖도록 하고 쿠바 음악가들이 그들의 음악을 해외로 퍼뜨리지 못하게 하는 방법이었습니다."[28] 이지 사나브리아는 마르티네스가 정확한 쿠바의 관점을 제시했을 가능성이 있지만, "살사는 그런 식으로 계획되지 않았다"고 응답했다.[28] 파니아 레코드의 공동 설립자인 조니 파체코는 여러 인터뷰에서 "살사"라는 용어에 대한 자신의 정의를 내렸다. “라 살사는, 그리고 항상 그랬듯이, 쿠바 음악입니다.” (“La salsa es, y siempre ha sido la musica Cubana.”) [29][30][31]
그 이름에서 나오는 마케팅 잠재력이 너무 커서 결국 마치토, 푸엔테, 심지어 쿠바의 음악가들조차 재정적 필요에 의해 그 용어를 받아들였다.[32][33][34]
3. 악기 구성
살사 밴드의 악기 편성은 대부분 아르세니오 로드리게스가 개발한 손 몬투노 앙상블을 기반으로 한다. 로드리게스는 전통적인 손 쿠바노 앙상블에 혼 섹션과 콩가를 추가했다. 일반적으로 봉고, 베이스, 트레스, 트럼펫 1대, 클라베스, 귀로, 마라카스와 같은 소규모 휴대용 타악기가 포함되며, 보통 가수가 연주한다. 때로는 피아노도 사용된다. 마치토 밴드는 팀발레스를 처음으로 시도한 밴드이다.[35]
로스 반 반은 50년 동안 두 종류의 앙상블( 차랑가, 트롬본 섹션)을 모두 실험해 왔다. 처음 15년 동안 밴드는 순수한 차랑가였지만, 나중에 트롬본 섹션이 추가되었다. 현재 밴드는 하이브리드라고 할 수 있다.
3. 1. 주요 악기
살사 밴드의 악기 편성은 대부분 아르세니오 로드리게스가 개발한 손 몬투노 앙상블을 기반으로 한다. 로드리게스는 전통적인 손 쿠바노 앙상블에 혼 섹션과 콩가를 추가했다. 일반적으로 봉고, 베이스, 트레스, 트럼펫 1대, 클라베스, 귀로, 마라카스와 같은 소규모 휴대용 타악기가 포함되며, 보통 가수가 연주한다. 때로는 피아노도 사용된다. 마치토 밴드는 팀발레스를 처음으로 시도한 밴드이다.[35] 봉고, 콩가, 팀발레스 이 세 개의 드럼은 대부분의 살사 밴드에서 표준 타악기가 되었으며, 전통적인 드럼 앙상블과 유사한 방식으로 기능한다. 팀발레스는 벨 패턴을 연주하고, 콩가는 보조 드럼 파트를 연주하며, 봉고는 즉흥 연주를 하여 리드 드럼을 모방한다. 봉고의 즉흥적인 변주는 '마르티요'(망치)로 알려진 반복적인 마르차 내에서 실행되며, 솔로를 구성하지 않는다. 봉고는 주로 벌스와 피아노 솔로 중에 연주된다. 노래가 몬투노 섹션으로 전환될 때, 봉고 연주자는 봉고 벨이라고 불리는 큰 휴대용 카우벨을 잡는다. 종종 '봉고세로'는 실제 봉고보다 곡에서 벨을 더 많이 연주한다. 팀발 벨과 봉고 벨의 맞물린 대위법은 몬투노 동안 추진력을 제공한다. 마라카스와 귀로는 규칙적인 맥박(하위 분할)의 꾸준한 흐름을 내며, 일반적으로 클라베에 중립적이다.
일부 밴드는 차랑가 형식을 따르는데, 이 형식은 현악 섹션 (바이올린, 비올라, 첼로), 콩가, 팀발레스, 베이스, 플루트, 클라베스, 귀로로 구성된다. 봉고는 일반적으로 차랑가 밴드에서 사용되지 않는다. 티피카 73, 오케스타 브로드웨이, 오케스타 레베 및 오케스타 리트모 오리엔탈은 차랑가 악기 편성을 가진 인기 있는 살사 밴드였다. 조니 파체코, 찰리 팔미에리, 몽고 산타마리아, 레이 바레토도 이 형식을 시도했다.
로스 반 반은 50년 동안 두 종류의 앙상블을 모두 실험해 왔다. 처음 15년 동안 밴드는 순수한 차랑가였지만, 나중에 트롬본 섹션이 추가되었다. 현재 밴드는 하이브리드라고 할 수 있다.
3. 2. 차랑가 형식
일부 밴드는 차랑가 형식을 따르는데, 이 형식은 현악 섹션 (바이올린, 비올라, 첼로), 콩가, 팀발레스, 베이스, 플루트, 클라베스 및 귀로로 구성된다. 봉고는 일반적으로 차랑가 밴드에서 사용되지 않는다.[35] 티피카 73, 오케스타 브로드웨이, 오케스타 레베 및 오케스타 리트모 오리엔탈은 차랑가 악기 편성을 가진 인기 있는 살사 밴드였다. 조니 파체코, 찰리 팔미에리, 몽고 산타마리아 및 레이 바레토도 이 형식을 시도했다.4. 리듬
살사 음악은 일반적으로 분당 160 비트(bpm)에서 220 bpm 사이로, 살사 댄스에 적합하다. 살사 음악의 주요 리듬에는 클라베, 툼바오, 몬투노 등이 있다.
4. 1. 클라베 리듬
살사 음악의 핵심 그루브는 클라베라는 악기가 담당한다. 클라베는 두 개의 나무 막대를 서로 부딪혀 연주한다. 살사 밴드의 모든 악기는 클라베와 함께 연주하거나(콩가, 팀발레스, 피아노, 트레스 기타, 봉고, 클라베, 현악기 등) 클라베 리듬과 독립적으로 연주한다(베이스, 마라카스, 귀로, 카우벨 등). 댄서는 언제든지 클라베 리듬에 맞춰 춤을 출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살사에는 4가지 유형의 클라베 리듬이 있다. 그중 3-2와 2-3 손 클라베가 가장 중요하며, 3-2와 2-3 룸바 클라베도 사용된다. 대부분의 살사 음악은 손 클라베 리듬으로 연주되지만, 일부 곡의 룸바 섹션에서는 룸바 클라베가 사용되기도 한다. 살사 댄스의 8비트 안에서 클라베가 어떻게 연주되는지 예를 들면, 2-3 손 클라베의 비트는 2, 3, 5, 6의 "앤드", 8에서 연주된다.
살사 음악에는 클라베 리듬 외에도 코드 비트, 툼바오, 몬투노 리듬 등 다른 일반적인 리듬이 있다.
코드 비트(주로 카우벨로 연주)는 살사의 홀수 카운트인 1, 3, 5, 7을 강조한다. 반면 툼바오 리듬(주로 콩가로 연주)은 음악의 "오프 비트"인 2, 4, 6, 8을 강조한다. 일부 댄서는 카우벨의 강한 소리를 기준으로 살사 리듬을 유지하는 것을 선호한다. 다른 댄서들은 콩가 리듬의 강한 "오프 비트"가 재즈 요소이기 때문에 이를 기준으로 춤에 더 재즈적인 느낌을 부여한다.
툼바오는 일반적으로 콩가 드럼으로 연주되는 리듬의 이름이다. 가장 기본적인 패턴은 비트 2, 3, 4, 6, 7, 8에서 연주된다. 툼바오 리듬은 콘트라-티엠포("On2") 춤을 배우는 데 도움이 된다. On2 춤에서는 2와 6의 비트가 강조되는데, 툼바오 리듬도 해당 비트를 크게 강조한다.
몬투노 리듬은 주로 피아노로 연주되는 리듬이다. 몬투노 리듬은 8 카운트 동안 반복되며, 이를 통해 음악의 방향을 찾을 수 있다. 8 카운트 후에 처음부터 반복되는 동일한 리듬을 들으면 음악의 첫 번째 비트가 어느 카운트인지 알 수 있게 된다.
4. 2. 툼바오와 몬투노
살사 음악에는 코드 비트, 툼바오, 몬투노 리듬과 같은 일반적인 리듬이 있다.코드 비트(주로 카우벨로 연주)는 살사의 홀수 카운트인 1, 3, 5, 7을 강조하는 반면, 툼바오 리듬(주로 콩가로 연주)은 음악의 "오프 비트"인 2, 4, 6, 8을 강조한다. 일부 댄서는 카우벨의 강한 소리를 사용하여 살사 리듬을 유지하는 것을 좋아하며, 다른 사람들은 강한 "오프 비트"가 재즈 요소이기 때문에 콩가 리듬을 사용하여 춤에 더 재즈적인 느낌을 준다.
툼바오는 일반적으로 콩가 드럼으로 연주되는 리듬의 이름이다. 가장 기본적인 패턴은 비트 2, 3, 4, 6, 7, 8에서 연주된다. 툼바오 리듬은 콘트라-티엠포("On2") 춤을 배우는 데 도움이 된다. On2로 춤을 출 때는 2와 6의 비트가 강조되며, 툼바오 리듬도 해당 비트를 크게 강조한다.
몬투노 리듬은 주로 피아노로 연주되는 리듬이다. 몬투노 리듬은 8 카운트 동안 반복되며 음악의 방향을 찾는 데 유용하다. 8 카운트 후에 처음부터 반복되는 동일한 리듬을 들으면 음악의 첫 번째 비트가 어느 카운트인지 알 수 있다.
5. 음악 구조
대부분의 살사 곡은 아프리카-쿠바 클라베 리듬을 기반으로 하는 기본적인 손 몬투노 모델을 따르며, 코로-프레곤 (호출 응답) 합창 섹션인 몬투노가 뒤따르는 구절 섹션으로 구성된다. 구절 섹션은 짧을 수도 있고, 리드 보컬리스트와 정교한 리듬 장치를 갖춘 세심하게 제작된 멜로디를 특징으로 하기 위해 확장될 수도 있다. 몬투노 섹션이 시작되면 일반적으로 곡이 끝날 때까지 이어진다. 흥분을 고조시키기 위해 몬투노 동안 템포가 점차 증가할 수 있다. 몬투노 섹션은 때때로 "맘보", "디아블로", "모냐" 및 "에스페셜"이라고 하는 다양한 하위 섹션으로 나눌 수 있다.[36]
6. 역사
살사 음악의 역사는 그 기원과 명칭에 대한 다양한 이야기들로 복잡하게 얽혀있다.
"살사"라는 단어는 스페인어로 소스를 의미하며, 이 단어가 음악 스타일과 연결된 기원은 음악 작가와 역사학자들 사이에서 논쟁의 대상이 되고 있다.[19] 맥스 살라자르는 1930년 이그나시오 피녜이로가 Échale salsitaes(양념을 좀 쳐봐)라는 곡을 작곡했을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고 보았다.[19] 1940년대 중반, 쿠바 출신 체오 마르케티는 멕시코에서 자신의 그룹 Conjunto Los Salseroses를 결성했고, 베니 모레는 공연 중 "살사"를 외치며 음악의 열기를 표현했다.[20][21]
푸에르토리코 출신 음악 프로모터 이지 사나브리아는 자신이 살사라는 단어를 음악 장르를 지칭하는 데 처음 사용했다고 주장한다. 그는 1973년 TV 쇼 '살사'를 진행하며 이 용어를 사용했지만, 당시에는 라틴 음악이라는 더 넓은 범주로 정의되었다고 설명한다.[22] 사나브리아는 ''뉴욕 타임스'', ''타임'', ''뉴스위크'' 등 주요 언론 매체에 자신의 행사를 홍보하며 살사라는 용어를 널리 알렸다.[23] 그러나 그는 음악가들이 이 용어를 만드는 데 직접적인 역할을 하지 않았다고 인정한다.[24]
이러한 이유로 살사라는 용어의 사용은 음악가들 사이에서 논란이 되었다. 셀리아 크루즈는 "살사는 다른 이름의 쿠바 음악"이라며 맘보, 차차차, 룸바, 손 등 모든 쿠바 리듬을 하나로 묶은 것이라고 긍정적으로 평가했다.[25] 윌리 콜론은 살사를 다양한 라틴계 및 비라틴계 인종, 민족 집단을 통합하는 힘으로 묘사했다.[26]
반면, 마치토는 "살사에는 새로운 것이 없다"며 50년 이상 쿠바에서 연주된 음악과 같다고 말했다. 티토 푸엔테는 "내가 아는 유일한 살사는 케첩"이라며 쿠바 음악을 연주한다고 강조했다.[27] 쿠바 음악학자 마이라 마르티네스는 살사라는 용어가 쿠바 음악의 역사와 쿠바 내 역사를 모호하게 만들고, 제리 마수치, 파니아, CBS와 같은 음반 회사들이 헤게모니를 갖도록 했다고 비판했다.[28] 조니 파체코는 "살사는 항상 쿠바 음악이었다"고 정의했다.[29][30][31] 그러나 마케팅 잠재력이 커지면서 마치토, 푸엔테, 쿠바 음악가들조차 재정적 필요에 의해 이 용어를 받아들였다.[32][33][34]
살사의 기원은 1930년대 쿠바 음악인 손과 룸바에서 발전된 것으로 여겨지며, 1960년대 뉴욕의 푸에르토리코인과 쿠바인 커뮤니티에서 라틴 음악에 재즈, 소울, 록 등을 도입하며 시작되었다는 설이 유력하다. 이후 1970년경까지 뉴욕에서 확립된 것을 살사의 기원으로 본다. 살사에 직접적인 영향을 준 음악은 쿠바의 손[82]으로, 스페인과 아프리카의 영향을 받았다.
쿠바 혁명 이후 미국과 쿠바의 국교가 단절되면서 뉴욕에는 쿠바 악단이 줄고, 푸에르토리코계 뮤지션들이 우세해졌다. 찰리 팔미에리, 조니 파체코, 레이 바렛[83] 등은 소울 음악과 맘보를 융합하여 60년대 초반 부갈루 붐을 일으켰다.
1964년, 조니 파체코는 파니아 레코드를 창립, 윌리 콜론, 엑토르 라보, 조 바탄 등 젊은 아티스트들을 배출하며 성장했다. 파니아 올스타즈는 1968년 레드 가터에서 첫 공연을 했고, 1971년 치타에서 역사적인 콘서트를 열었다. 1973년에는 양키 스타디움에서 4만 명 앞에서 공연했으나, 관중 난입으로 중단되었다.
1970년대 초, 파냐 올스타즈의 공헌으로 살사는 뉴욕에서 라틴 아메리카로 퍼져나갔다.[86][87] 콜롬비아에서는 조 아로요 등이 쿰비아, 바예나토 요소를 살사와 결합했다. 윌리 콜론은 쿠아트로를 도입하고, 래리 할로우는 전기 피아노를 더해 모던 살사를 만들었다. 1970년대 후반, 살사는 쿠바 음악에 영향을 미쳤다.
1980년대에는 살사 로만티카가 등장, 호세 알베르토가 1984년 "Noches Calientes" 앨범을 발매했다.[88] 글로리아 에스테판은 1986년 "콩가"를 히트시켰다. 1980년대 후반, 메렝게 (음악)가 인기를 얻었다. 살사는 베네수엘라, 콜롬비아, 파나마 등 라틴 아메리카와 미국, 유럽, 일본, 아프리카 등으로 확산되었다. 오르케스타 데 라 루스는 1989년 첫 앨범을 발매했고, 그루포 니체, 조 아로요 등은 살사 두라로 인기를 얻었다.
살사는 하우스 음악, 레게톤, 테크노 등과 융합되어 존재하고 있다.
6. 1. 1930-40년대: 쿠바에서의 기원
스페인어로 소스를 의미하는 "살사"라는 단어와 음악 스타일 간의 연관성은 여러 음악 작가와 역사학자들 사이에서 논쟁의 대상이 되고 있다.[19]음악학자 맥스 살라자르는 1930년 이그나시오 피녜이로가 Échale salsitaes(양념을 좀 쳐봐)라는 곡을 작곡했을 때 이 용어가 처음 사용되었다고 보았다.[19] 이 표현은 피녜이로가 밴드에게 템포를 높여 "춤추는 사람들을 흥분시키라"고 외치는 소리로 여겨진다.[20] 1940년대 중반, 쿠바 출신 체오 마르케티는 멕시코로 이민하여 자신의 그룹 이름을 Conjunto Los Salseroses라고 지었고, Panart와 Egrem 레이블에서 두 장의 앨범을 녹음했다. 이후 멕시코 시티에 거주하면서 음악가 베니 모레는 공연 중에 "살사"라고 외치며 음악의 열기를 표현했는데, 이는 멕시코의 매운 살사 (소스)와 연결되었다.[20][21]
많은 음악학자들은 살사 음악의 많은 요소들이 1930년대와 40년대의 여러 예술가들에게서 발견된다고 본다. 예를 들어 아르세니오 로드리게스, 콩준토 차포틴(아르세니오의 전 밴드로, 펠릭스 차포틴이 이끌고 루이스 "릴리" 마르티네즈 그리냔이 참여), 로베르토 파즈의 손 몬투노 등이 있다. 살사 뮤지션 에디 팔미에리는 "우리 음악에 대해 이야기할 때는 아르세니오 이전과 이후에 대해 이야기한다. ... 릴리 마르티네즈는 나의 스승이었다"라고 말하기도 했다.[37] 아르세니오 밴드의 곡 중 'Fuego en el 23es', 'El Divorcioes', 'Hacheros pa' un paloes', 'Bruca maniguáes', 'No me lloreses', 'El reloj de Pastoraes'는 이후 많은 살사 밴드(예: 소노라 폰세냐와 조니 파체코)에 의해 커버되었다.
맘보라는 또 다른 스타일은 카차오, 베니 모레, 다마소 페레즈 프라도에 의해 개발되었다. 모레와 페레즈 프라도는 멕시코시티로 이동했고, 그곳에서 멕시코 빅 밴드 관악 오케스트라에 의해 연주되었다.[38]
살사의 기원은 1930년대의 쿠바 음악인 손과 룸바에서 발전된 것으로 여겨진다. 1920년대부터 30년대에 걸쳐, 금주법이 시행된 미국에서의 관광 붐도 더해져, 손이 쿠바에서 큰 인기를 얻어 많은 악단이 연주했다. 1930년 4월 26일, 쿠바 출신의 돈 아스피스(Don Aspiaz)가 이끄는 악단이 뉴욕의 팰리스 극장에서 쇼를 개최하여 대호평을 받으면서 레코드 회사가 녹음했고, 1931년에는 "El Maniseroes(땅콩 장수)"가 당시로서는 이례적인 백만 장의 대히트를 기록했다. 여기에서 "룸바 에이지"라고 불리는 1930년대의 룸바 대 붐이 일어났다(이때 명명된 룸바는 사교 댄스의 스타일을 의미하는 룸바이며, 쿠바에 있는 아프리카 계 음악의 룸바가 아니다).
쿠바의 다른 음악 장르도 다소간 손의 영향을 받아 융합되어, 다양한 아류의 손이 탄생하고 변질되었다. 그중에서도 1940년대에는 손 몬투노가 인기를 얻었다. 손 안의 몬투노(콜 앤드 리스폰스) 파트를 강조하여, 보다 아프리카적인 색채를 더했고, 트레스 대신 색소폰이나 트럼펫, 피아노가 악단의 편성에 추가되었다. 과거의 손 악단의 편성은 세스테토(6인 편성), 또는 셉테토(7인 편성)였지만, 1940년대가 되면서 쿠바의 악단은 대규모가 되었다.
재즈의 영향을 받은 대규모 편성으로 뮤지션들이 데스카르가(잼 세션)를 반복하는 가운데, 손 몬투노의 리듬에서 맘보가 탄생했다. 1944년에는 안셀모 사카사스(Anselmo Sacasas)가 "El Mamboes"를 녹음했고, 멕시코 시티에서는 페레즈 프라 도가 1949년에 "맘보 No.5"를 녹음하는 등, 1940년대는 라틴 음악의 주류가 맘보로 옮겨간 시기이다. 이 시기 뉴욕에서는 아르세니오 로드리게스와 펠릭스 차포틴, 마치토, 티토 푸엔테 등이 대규모 악단을 각각 이끌고, 팔라디움 나이트클럽을 거점으로 활약했다. 그 속도감과 다이나믹한 사운드로, 맘보는 일대 붐이 되었다.
6. 2. 1950-60년대: 뉴욕으로의 이동
1950년대에 뉴욕은 페레스 프라도, 차노 포조, 몽고 산타마리아, 마치토, 티토 푸엔테와 같은 음악가들과 함께 맘보의 중심지가 되었다. 특히 팔라디움 볼룸은 뉴욕 맘보의 중심지로 큰 인기를 누렸다.[39]민족음악학자 에드 모랄레스는 뉴욕에서 아프로-쿠반 음악과 재즈의 상호 작용이 두 음악 형태 모두의 혁신에 매우 중요했다고 언급한다. 마리오 바우사와 차노 포조와 같이 맘보의 위대한 혁신가가 될 음악가들은 캐브 캘러웨이, 엘라 피츠제럴드, 디지 길레스피와 같은 재즈 거장들과 긴밀하게 협력하며 뉴욕에서 경력을 시작했다. 모랄레스는 "북미 재즈와 아프로-쿠반 음악 간의 상호 연결은 당연하게 여겨졌고, 음악 팬들이 혁신에 익숙해지면서 뉴욕에서 맘보 음악이 등장할 무대가 마련되었다."라고 언급하며, 맘보가 훗날 살사가 널리 수용되는 길을 열었다고 덧붙였다.[39]
1960년대 초까지 뉴욕에는 조니 파체코, 찰리 팔미에리, 몽고 산타마리아, 레이 바레토 등 훗날 살사 스타가 될 음악가들이 이끄는 여러 차랑가 밴드가 있었다.
1952년, 아르세니오 로드리게스는 짧은 기간 동안 뉴욕으로 이주하여 그의 현대적인 손 몬투노를 가져갔다. 그 기간 동안 그의 성공은 제한적이었지만(뉴욕은 맘보에 더 관심이 많았다), 그의 과헤오(그가 무대에서 함께 했던 차노 포조, 마치토, 마리오 바우사와 같은 음악가들에게 영향을 미쳤다)는 10년 후 이 지역에서 매우 중요해질 것이다.[40]
1966년, 팔라디움은 주류 면허를 잃어 문을 닫았다.[41] 맘보는 쇠퇴했고, 부갈루, 할라 할라, 싱어 링과 같은 새로운 하이브리드 스타일이 짧지만 중요한 성공을 거두었다.[41] 부갈루의 요소는 티토 푸엔테, 에디 팔미에리, 마치토, 심지어 아르세니오 로드리게스의 일부 곡에서도 들을 수 있다.[42] 그럼에도 불구하고 푸엔테는 "그것은 끔찍했다... 시대에 발맞추기 위해 녹음했다."라고 회상했다.[43] 인기 있는 부갈루 노래로는 조 쿠바 섹스텟의 "Bang Bang"과 피트 로드리게스와 그의 오케스트라의 "I Like It Like That"이 있다.
1960년대 후반, 도미니카 음악가 조니 파체코와 이탈리아계 미국인 사업가 제리 마수치는 음반 회사 파니아 레코드를 설립했다. 그들은 윌리 콜론, 셀리아 크루즈, 래리 할로우, 레이 바레토, 엑토르 라보, 이스마엘 미란다를 포함하여 나중에 살사 운동과 동일시될 많은 아티스트를 소개했다. 파니아의 첫 번째 앨범은 1964년에 녹음 및 발매된 "Cañonazo"였다. 파체코는 1968년에 파니아 올스타스를 결성하기 위해 퍼커셔니스트 루이 라미레스, 베이시스트 바비 발렌틴, 편곡자 래리 할로우를 포함하는 팀을 구성했다. 한편, 푸에르토리코 밴드 라 소노라 폰세냐는 아르세니오 로드리게스의 노래를 제목으로 한 두 개의 앨범('Hachero pa' un palo'와 'Fuego en el 23')을 녹음했다.
6. 3. 1970년대: 뉴욕에서의 발전과 쿠바의 송고
1970년대에 쿠바 손은 아바나와 뉴욕에서 두 가지 방식으로 현대화되었다. 이 시기에 '살사'라는 용어가 뉴욕에서 도입되었고, 송고는 아바나에서 발전했다.베이스 연주자 후안 포르멜이 이끄는 밴드 로스 반 반은 1960년대 후반에 송고를 개발하기 시작했다. 송고는 민속 룸바, 펑크, 록의 리듬 요소를 전통적인 손에 통합했다. 드러머 창기토가 등장하면서 여러 새로운 리듬이 도입되었고, 이 스타일은 손 몬투노/맘보 기반 구조에서 더욱 크게 벗어났다.[44]
송고는 주류 살사와는 여러 면에서 재즈, 록, 펑크와 같은 북미 스타일의 요소를 통합했다. 살사가 노래의 브리지에서 다른 장르의 요소를 덧붙이는 반면, 송고는 리듬과 화성의 하이브리드로 간주되었다(특히 펑크와 클라베 기반 쿠바 요소와 관련하여). 음악 분석가 케빈 무어는 "쿠바 음악에서 전에 들을 수 없었던 화성은 북미 팝에서 분명히 차용되었으며, 쿠바 대중음악이 오랫동안 충실히 지켜왔던 화성의 공식적인 제약을 깨뜨렸다."라고 언급했다.[45] 같은 기간 동안 쿠바 슈퍼 그룹 이라케레는 비밥과 펑크를 바타 드럼 및 기타 아프리카-쿠바 민속 요소와 융합했고, 오케스트라 리트모 오리엔탈은 샤랑가 앙상블에서 새로운 고도로 신코페이션된 룸바 영향을 받은 손을 만들었으며, 엘리오 레베는 창구이를 개발했다.[46]

한편, 뉴욕에서는 1970년대에 라틴 댄스 음악의 여러 스타일을 상업화하기 위해 '살사'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했다. 그러나 일부 음악가들은 살사가 자체적인 생명력을 얻어 진정한 범 라틴 아메리카 문화 정체성으로 유기적으로 진화했다고 믿는다. 음악 교수이자 살사 트롬본 연주자인 크리스토퍼 워시번은 다음과 같이 적었다.
> 살사의 이러한 범 라틴 연관성은 1960년대에 발생한 펠릭스 파디야가 '라틴화' 과정이라고 명명한 것에서 비롯되었으며 파니아 레코드에서 의도적으로 마케팅했다. "파니아에게 살사의 라틴화는 제품을 동질화하고, 모든 라틴 아메리카와 미국 내 스페인어를 사용하는 공동체 사람들이 식별하고 구매할 수 있는 포괄적인 푸에르토리코, 범 아메리카 또는 라틴 사운드를 제시하는 것을 의미했다." 주로 경제적 요인에 의해 동기 부여를 받은 파니아는 라틴 아메리카 전역의 국가들이 살사를 받아들이도록 밀어붙였고, 그 결과 시장이 확대되었다. 그러나 1970년대 동안 콜롬비아, 도미니카 공화국, 베네수엘라 등 라틴 아메리카 국가에서 살사 그룹이 등장하여 각자의 문화적 경험과 소속에 관련된 음악을 작곡하고 연주하면서 살사를 해당 국가의 문화 정체성 표지로 자리매김했다.[47]
1971년, 파니아 올스타는 양키 스타디움을 매진시켰다.[48] 1970년대 초, 음악의 중심은 맨해튼과 치타로 옮겨갔고, 그곳에서 프로모터 랄프 메르카도는 점점 더 커져가는 다양한 라틴 관객에게 많은 미래의 푸에르토리코 살사 스타들을 소개했다. 1970년대에는 또한 뉴욕시에서 앙헬 카날레스, 앤디 할로우, 치노 로드리게스(치노 로드리게스는 파니아 레코드의 소유주 제리 마수치의 눈에 띈 최초의 중국계 푸에르토리코 예술가 중 한 명이었고, 나중에 많은 파니아 아티스트의 에이전트가 되었다), 웨인 고르베아, 에르니 아구스토 y 라 콘스피라시온, 오케스트라 레이 제이, 오케스트라 푸에고, 오케스트라 시마론 등 이스트 코스트의 살사 시장에서 활동하는 새로운 반 유명 살사 밴드들이 등장했다.
소노라 마탄세라와 함께 쿠바에서 성공적인 경력을 쌓았던 셀리아 크루스는 살사 운동으로 전환하여 결국 ''살사의 여왕''으로 알려지게 되었다.[49][50][51]
래리 할로우는 더 후의 토미 앨범에서 영감을 받아 그의 오페라 ''호미''(1973)를 발표했고, 비평가들의 찬사를 받은 ''라 라자 라티나, 살사 스위트''를 발매했다.
1975년, 로저 도슨은 WRVR FM에서 "선데이 살사 쇼"를 만들었는데, 이는 매주 일요일마다 25만 명 이상의 청취자를 기록하며 뉴욕 시장에서 가장 높은 시청률을 기록한 라디오 쇼 중 하나가 되었다(Arbitron 라디오 시청률 기준). 아이러니하게도, 당시 뉴욕의 히스패닉 인구가 200만 명이 넘었음에도 불구하고 상업 히스패닉 FM은 없었다. 재즈와 살사 콩가 연주 경험과 지식(살사의 프랭키 단테스 오르케스타 플람보얀과 재즈 색소폰 연주자 아치 셉과 같은 밴드와 함께 사이드맨으로 활동)을 바탕으로 도슨은 또한 빌리지 게이트 재즈 클럽에서 오랫동안 진행된 "살사 미츠 재즈" 주간 콘서트 시리즈를 만들었는데, 재즈 음악가들이 살사 밴드와 함께 연주하는 것이었다. 예를 들어 덱스터 고든이 마치토 밴드와 함께 잼을 하는 것이다. 도슨은 뉴욕의 살사 청중을 확대하는 데 도움을 주었고, 당시 히스패닉 AM 방송국에서 방송되지 않던 이중 언어 사용자인 앙헬 카날레스와 같은 새로운 아티스트를 소개했다. 그의 쇼는 당시 라틴 뉴욕 잡지 독자, 이지 사나브리아의 ''살사 매거진''에서 여러 상을 받았으며 1980년 말 비아콤이 WRVR의 형식을 컨트리 음악으로 변경할 때까지 운영되었다.[52]
재즈, 록, 봄바 및 플레나와 같은 비 쿠바 영향을 흡수하려는 의지, 그리고 이미 존재했던 맘보-재즈와 같은 실험에 대한 개방성에도 불구하고, 뉴욕에서 이 기간 동안 쿠바가 아닌 장르에 기반한 살사 작곡의 비율은 매우 낮았고, 송고와 달리 살사는 구식 쿠바 템플릿에 일관되게 묶여 있었다.[53][54] 일부는 살사의 범 라틴 아메리카주의가 음악적 구조보다 문화적 환경에서 발견되었다고 믿는다.[55]
이의 예외는 아마도 에디 팔미에리와 매니 오켄도의 작품에서 발견될 것이며, 이들은 고도로 제작된 파니아 레코드 아티스트보다 더 모험적인 것으로 여겨졌다. 두 밴드는 덜 피상적인 재즈 요소뿐만 아니라 현대적인 모잠비크 (음악)를 통합했다. 그들은 배리 로저스(그리고 스타일을 마스터한 다른 "앵글로" 재즈 음악가)와 같은 뛰어난 트롬본 솔로이스트로 알려졌다. 팔미에리와 오켄도와 함께 공연한 베이스 연주자 앤디 곤잘레스는 "우리는 즉흥 연주에 빠져 있었고... 마일스 데이비스가 하던 방식, 즉 테마를 연주하고 곡의 테마에 맞춰 즉흥 연주를 했는데, 세트 전체를 연주하는 것을 멈추지 않았어요."라고 회상한다.[56] 앤디와 그의 형제 제리 곤잘레스는 DownBeat 독자 투표에 등장하기 시작했고, 재즈 평론가들의 관심을 끌었다.
6. 4. 1980년대: 라틴 아메리카로의 확산과 팀바의 탄생
1980년대에 콜롬비아, 베네수엘라, 페루, 멕시코, 파나마 등 여러 라틴 아메리카 국가에서 자체 살사 음악을 제작하기 시작했다.[57] 이 시대의 가장 큰 스타 2명은 베네수엘라 출신의 오스카 D'레온과 콜롬비아 출신의 조 아로요이다.[58] 다른 인기 있는 아티스트로는 프루코 이 수스 테소스, 그루포 니체, 루벤 블레이즈(솔로)가 있다.이 시기에 쿠바는 처음으로 국제 살사 음악가들을 맞이했다. 베네수엘라의 살사 스타 오스카 D'레온의 1983년 쿠바 투어는 많은 쿠바인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루벤 블레이즈의 앨범 ''시에엠브라''는 80년대 중반 내내 섬 전역에서 들렸으며, 반 반의 마이토 리베라부터 엘 메디코 데 라 살사에 이르기까지 많은 이들에게 영향을 주었다.[59]
D'레온의 공연 전, 많은 쿠바 음악가들은 살사 운동을 쿠바 음악의 형편없는 모방으로 간주하며 거부했다. 어떤 사람들은 D'레온의 공연이 오래된 템플릿을 되살리고 팀바의 발전을 촉진하는 "살사 열풍"에 동력을 제공했다고 말한다.
팀바가 탄생하기 전, 쿠바 댄스 음악은 로스 반 반, 오르케스타 리트모 오리엔탈, 오르케스타 레베와 같은 차랑가, 아달베르토 알바레즈 이 손 14, 콘준토 룸바바나, 오르케스타 마라비야스 데 플로리다와 같은 콘준토, 그리고 재즈 밴드 이라케레와 같은 여러 밴드들 사이에서 고도의 실험을 거쳤다.[60]
팀바는 호세 루이스 "엘 토스코" 코르테스의 지휘하에 나중에 NG 라 반다를 결성한 이라케레의 음악가들에 의해 만들어졌다. 많은 팀바 곡들은 10년 초반의 쿠바 음악보다 주류 살사와 더 관련이 있다. 예를 들어, NG 라 반다의 "라 엑스프레시바"라는 곡은 전형적인 살사 팀바/봉고 벨 조합을 사용한다. 툼바도라스(콩가)는 songo 스타일이 아닌 손 몬투노 기반 툼바오에 대한 정교한 변주를 연주한다. 이러한 이유로 마놀리토 이 수 트라부코, 오르케스타 수블리메, 이라케레와 같은 이 시대의 일부 쿠바 음악가들은 이 80년대 후반의 사운드를 ''살사 쿠바나''라고 불렀으며, 이는 쿠바 음악을 살사 운동의 일부로 처음 포함시킨 용어이다. 1990년대 중반, 캘리포니아에 본사를 둔 벰베 레코드는 ''살사 쿠바나 시리즈''의 일부로 여러 쿠바 밴드의 CD를 발매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스타일은 몇 가지 혁신을 포함했다. 베이스 툼바오는 전형적으로 뉴욕 살사에서 들을 수 있는 툼바오보다 더 바쁘고 복잡했다. 일부 과헤오는 쿠바 재즈 피아니스트 곤잘로 루발카바의 "화성 변위" 기법에서 영감을 받았다. 흥미롭게도, 힙합과 살사가 처음 만난 곳은 쿠바였다. 예를 들어, NG 라 반다의 앨범 ''엔 라 칼레''의 많은 브레이크다운 섹션은 과과노와 힙합 리듬의 조합이다.
이 시기에 쿠바 음악가들은 미국에서 살사보다 재즈에 더 큰 영향을 미쳤다. 마리엘 보트리프트가 수백 명의 쿠바 음악가를 미국으로 데려왔지만,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은 1950년대의 쿠바 음악처럼 들리는 것을 듣고 깜짝 놀랐다. 쿠바의 콩게로 다니엘 폰세는 이러한 정서를 요약했다.[61]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에서는 현대 쿠바 스타일을 인식하고 있었다. 티토 푸엔테는 이라케레의 곡 "바칼라오 콘 판"(1980)을 녹음했고, 루벤 블레이즈는 로스 반 반의 "무에베테"(1985)를 커버했다. 푸에르토리코 밴드 바타쿰벨레와 사페로코는 찬구이토의 멘토십 하에 송고 음악을 완전히 받아들였다.
80년대에는 사랑과 로맨스를 다룬 가사와 함께 살사 로만티카와 살사 에로티카와 같은 살사의 다른 변형이 발전했다. 살사 로만티카는 프로듀서 루이 라미레즈와 함께 한 가수 호세 알베르토 "엘 카나리오"의 1984년 앨범 ''노체스 칼리엔테스''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일부 사람들은 살사 로만티카를 이 장르의 리듬상 약화된 버전으로 보았다. 특히 80년대 후반과 90년대 초반의 ''살사 로만티카'' 비평가들은 이를 공식적이고 감상적인 사랑 발라드가 아프로-쿠바 리듬에 맞춰 단순하게 들어간 상업화된 희석된 형태의 라틴 팝이라고 불렀으며, 클래식 살사의 훌륭한 즉흥 연주나 일상생활의 이야기를 들려주거나 사회적, 정치적 논평을 제공하는 클래식 살사 가사를 위한 공간이 없었다. 이러한 스타일의 일부 아티스트로는 오마르 알판, 팔머 에르난데스, 호르헤 루이스 필로토가 있다.
6. 5. 1990년대: 팝 살사와 팀바의 폭발적 인기
1990년대는 미국에서 "팝 살사", 쿠바에서 "팀바 폭발"로 특징지어진다.세르지오 조지는 티토 니에베스, 라 인디아, 마크 앤서니와 같은 푸에르토리코 출신 아티스트들과 함께 살사를 현대 팝 스타일과 혼합한 여러 앨범을 제작했다.[62] 조지는 또한 일본 살사 밴드 오르케스타 데 라 루스도 프로듀싱했다. 브렌다 K. 스타, 손 바이 포, 빅토르 마누엘, 쿠바계 미국인 가수 글로리아 에스테판은 라틴 영향을 받은 히트곡으로, 주로 영어로 불리며 앵글로 아메리카 팝 시장에서 크로스오버 성공을 거두었다.[62] 이러한 히트곡의 작곡이나 편곡에서 클라베는 그다지 중요하게 고려되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세르지오 조지는 클라베에 대한 자신의 태도에 대해 솔직하고 거리낌이 없다. "클라베를 고려하지만, 항상 제 음악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제 마음속의 가장 중요한 문제는 시장성입니다. 노래가 히트하면 그게 중요한 겁니다. 음악가들에게 감명 주려던 것을 멈추고 거리의 사람들이 무엇을 듣고 있는지 알게 되자 히트곡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미국에서 시작된 영어 노래의 경우, 때로는 클라베에 맞추는 것이 불가능합니다."[63] 하지만 워시번이 지적하듯이, 클라베 인식이 부족하다고 해서 항상 넘어가는 것은 아니다.
> 마크 앤서니는 조지의 혁신적인 접근 방식의 산물이다. 라틴 음악 초심자로서, 그는 음악 구조에 대한 지식 없이 밴드 리더 자리에 올랐다. 1994년, 그가 살사 경력을 시작한 직후의 공연에서 한 가지 흥미로운 순간이 있었다. 피아노 솔로 중 그는 팀발레스에 다가가 스틱을 들고 밴드와 함께 클라베 블록에서 클라베를 연주하려고 시도했다. 그는 리듬을 어디에 맞춰야 하는지 전혀 모른다는 것이 분명해졌다.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산후안(푸에르토리코)에서 한 라디오 인터뷰에서 그는 자신의 상업적 성공은 라틴 음악에서 성공하기 위해 클라베를 알 필요가 없다는 것을 증명한다고 외쳤다. 이 발언은 푸에르토리코와 뉴욕에서 격렬한 반발을 일으켰다. 좋지 않은 언론 보도를 받은 후, 앤서니는 공개적으로 이 주제에 대해 언급하는 것을 자제했고, 개인 레슨을 받기 전까지 무대에서 클라베를 연주하려 시도하지 않았다.[64]

쿠바에서는 라 차랑가 아바네라의 데뷔 앨범인 ''Me Sube La Fiebre''가 1992년에 발매되면서 "팀바 폭발"이라고 알려지게 되었다. NG 라 반다와 마찬가지로 차랑가 아바네라는 기어 변속 및 곡별 툼바오와 같은 몇 가지 새로운 기술을 사용했지만, 그들의 음악 스타일은 크게 달랐고, 각 앨범마다 계속 변화하고 발전했다. 차랑가 아바네라는 90년대에 세 가지 뚜렷한 스타일 시기를 거쳤으며, 세 앨범[65]으로 대표된다. 마놀린 "엘 메디코 데 라 살사"는 이 시대의 또 다른 슈퍼스타였다. 마놀린의 창작팀에는 루이스 부와 차카 나폴레스를 비롯한 여러 편곡자들이 포함되었다. 마놀린은 엄격한 음악적 관점에서 볼 때 영향력이 컸지만, 그의 카리스마, 인기, 전례 없는 수입 능력은 더욱 지각 변동적인 영향을 미쳐 1950년대 이후 볼 수 없었던 수준의 흥분을 음악가들 사이에 일으켰다.[66]
''살사 쿠바나''는 다시 인기를 잃고, ''팀바''로 대체되었다. 다른 중요한 팀바 밴드에는 아수카르 네그라, 마놀린 "엘 메디코 데 라 살사", 아바나 데 프리메라, 클리맥스, 파울리토 FG, 살사 마요르, 티엠포 리브레, 파치토 알론소 이 수스 키니 키니, 밤볼레오, 로스 단 덴, 알랭 페레즈, 이사크 델가도, 티르소 두아르테, 클리맥스, 마놀리토 이 수 트라부코, 파울로 FG, 푸피 이 로스 케 손 손 등이 있다.
쿠바 팀바 음악가와 뉴욕 살사 음악가들은 수년에 걸쳐 긍정적이고 창의적인 교류를 해왔지만, 두 장르는 어느 정도 분리되어 다른 청중에게 어필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000년에 로스 반 반은 최초의 그래미상 최우수 살사 앨범을 수상했다.
콜롬비아에서 살사는 소노라 카루세레스, 카를로스 비베스, 오르케스타 구아야칸, 그루포 니체, 키케 산탄데르, 그리고 훌리안 콜라조스 와 같은 인기 밴드를 배출하면서 여전히 인기 있는 음악 스타일로 남아 있었다. 칼리시는 콜롬비아의 "살사의 수도"로 알려지게 되었다.[67] 베네수엘라에서는 카비재즈가 강력한 재즈적 영향을 받은 팀바 스타일의 살사를 독특하게 혼합하여 연주했다.
6. 6. 2000년대 이후: 팀바 퓨전과 세계적 확산
2000년대 후반과 2010년대에 걸쳐 일부 팀바 밴드들은 살사, 팀바, 힙합, 레게톤을 혼합한 새로운 음악을 선보였다. 예를 들어 차랑가 아바네라는 ''고잔도 엔 라 아바나''를, 푸피 이 로스 케 손, 손은 ''로코 콘 우나 모토''를 발표했다.[68][69] 몇 년 후, 쿠바 레게톤 밴드 젠테 데 소나와 마크 앤서니는 팀바와 레게톤을 결합한 ''라 고자데라''를 발표하여 유튜브에서 10억 뷰 이상을 기록했다.이 시기에는 쿠바톤으로 알려진 스타일도 인기를 얻었는데, 이는 살사/팀바의 요소를 일부 포함한 레게톤 기반의 음악이었다.
7. 가사
살사 가사는 단순한 댄스곡, 감성적인 로맨틱 송에서부터 위험하고 정치적으로 급진적인 주제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음악 작가 이자벨 레이마리는 살사 연주자들이 종종 마초적인 브라바도(`guapería`)를 가사에 담아내는데, 이는 칼립소 음악과 삼바 음악을 연상시키는 방식이며, 그녀는 이 주제를 연주자들의 "가난한 배경"과 그에 따른 출신에 대한 보상 욕구로 해석한다. 레이마리는 살사가 "본질적으로 남성적이며, 남자의 자부심과 정체성을 확인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77] 살사의 마초적인 입장의 연장선상에서, 남성적인 조롱과 도전 (`desafio`) 역시 살사의 전통적인 부분이다.[77]
살사 가사는 종종 전통적인 쿠바 손과 룸바를 인용한다. 때로는 스스로 신앙을 실천하지 않는 예술가들에 의해서도 아프리카계 쿠바 종교, 예를 들어 산테리아에 대한 언급이 있다.[78] 살사 가사는 또한 푸에르토리코의 영향을 보여준다. 윌리 콜론과 거의 10년 동안 함께 노래한 엑토르 라보에는 그의 노래에 전형적인 푸에르토리코 구절을 사용했다.[79] 이제 살사에서 푸에르토리코의 선언적인 외침 "le-lo-lai"를 듣는 것은 드문 일이 아니다.[80] 정치적, 사회적으로 활동적인 작곡가들은 오랫동안 살사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해 왔으며, 에디 팔미에리의 "La libertad - lógico"와 같은 그들의 작품 중 일부는 라틴, 특히 푸에르토리코의 찬가가 되었다. 특히 파나마 출신 가수 루벤 블레이즈는 제국주의에서 군축, 환경 보호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에 대한 사회 의식이 담긴 통찰력 있는 살사 가사로 유명하며, 이는 라틴 아메리카 전역의 청중들에게 반향을 일으켰다.[81] 많은 살사 노래에는 흑인 라틴 정체성에 대한 자부심을 중심으로 한 민족주의적 주제가 포함되어 있으며, 스페인어, 영어 또는 이 둘의 혼합어인 스팽글리시로 되어 있을 수 있다.
8. 댄스
살사 댄스는 1960년대 후반부터 1970년대 초반 뉴욕에서 푸에르토리코인과 쿠바인 사이에서 유행하기 시작했다.[89] 댄스로서의 살사는 1클라베 = 8박자의 음악에 6스텝을 맞춰 춤을 추기 때문에 싱코페이션에 맞춰 1, 5박자를 스텝하지 않는 (N,Y 스타일 - 푸에르토리코 계), 1박자부터 스텝을 시작해 4, 8박자를 스텝하지 않는 (L,A, 스타일 - 쿠바 계), 싱코페이션에 맞춰 2박자부터 시작하지만 4(8)박자와 다음 5(1)박자를 타이로 연결해 스텝의 공백을 만들지 않는 (N,Y, 클럽 on2) 등이 있으며, 각각 댄스 스타일은 조금씩 다르다.
일본에서는 댄스 스포츠의 한 항목으로 인식된 지 오래되었지만, 팝 가수 리키 마틴, 마크 앤서니 등의 인기가 높아짐에 따라 열성적인 살사 강사, 중남미 출신의 돈벌이 이민자, 일본계 이민자를 중심으로 일부 클럽 등에서 인기가 뿌리내리고 있다.
중남미, 북미에서는 일반적인 라틴 이민자들의 대중적인 춤으로 녹아들어 있다. 미국으로의 라틴계 이민자 중에서도 젊은 세대는 살사를 "가족끼리 모일 때의 여흥"으로 보는 인식이 강했지만, 일반적인 미국 사회에 침투함에 따라 지금은 많은 라티나, 라티노가 사회에 진출하고 있다. 원래 라틴계 이민자가 많은 뉴욕이나 로스앤젤레스 등의 대도시에서는 살사 학습 클래스나 클럽이 늘고 있다.
참조
[1]
서적
Waxer 2002, pp. 91–94
[2]
서적
Gerard 1989, pp. 8–9
[3]
간행물
Salsa Losing Popularity To Ballads On City Airwaves
https://books.google[...]
1985-01-26
[4]
서적
All Music Guide: World Music
https://books.google[...]
Hal Leonard Corporation
[5]
문서
Catapano 2011. "Although a great number of New York's stars and sidemen in the 1970s were Cuban and Puerto Rican, the basic musical elements of salsa were derived mainly from Cuba."
[6]
문서
Morales 2003, p. 33. Morales writes that "While many Afro-Cuban music purists continue to claim that salsa is a mere variation on Cuba's musical heritage, the hybridizing experience the music went through in New York from the 1920s on incorporated influences from many different branches of the Latin American tradition, and later from jazz, R&B, and even rock." Morales' claim is confirmed by Unterberger's and Steward's analys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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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uleón 1993, p. 215. Mauleón codifies this approach with examples of bomba, plena, and merengue arrangements for the salsa ensembles. When adapting these non-Cuban rhythms to salsa it is common to alter them in order to fit into the Cuban template. For example, Mauleón's merengue chart includes clave, which is essential to Cuban popular music, although it is not a component of the traditional Dominican rhyth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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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erard 1989, pp. 8–9. "From jazz came a harmonic vocabulary based on extended harmonies of altered and unaltered ninths, elevenths and thirteenths, as well as quartal harmony—chords built on fourths. These harmonic devices entered salsa in the piano styles of Eddie Palmieri and the Puerto Rican Papo Lucca. They would take traditional piano figures based on simple tonic-dominant harmony and elaborate them with modern harmonies. These modern harmonies are now a staple of salsa arrangers such as Marty Sheller and Óscar Hernánde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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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ggs 1992, p. 192. Izzy Sanabria: "In Santo Domingo ... they told me that they don't recognize a Dominican artist as having made it in New York City unless a photograph and something written on this artist appears in ''Latin New York''. I said 'but why?' And what he said: 'Because we consider ''Latin New York'' a North American publication.' You see what I mean? In other words, it's an American publication. It was in English. So because it was in English, because it was from America, then it's legitimate. That in a sense, was the major impact of ''Latin New Yo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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